Memory lane

그때 그사람 - 천재소년 김응용

Wednesdaykid 2010. 6. 11. 03:08

천재 딱지떼니 살맛나요

김응용...IQ 210의 천재 소년...

그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인생에 있어서 숫자란 과연 무엇일까. 

태어나고 죽음이 다들 같을진대 굳이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을 가려내는 것도 틀에 박힌 숫자의 장난은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묘비의 글을 ‘진달래가 만발한 봄날 태어났고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어느 청명한 가을날 조용히 잠들다. ’라고 하면 어떨지.

지능지수(IQ) 210, 흔치 않은 숫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재라 했다. 

1980년도판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의 지능지수로 등재될 정도였다. 


5세에 4개국어를 구사하고,6세때 일본 

후지TV
에 출연, 수학 미적분을 척척 풀

어냈다. 

7세까지 청강생으로 한양대에서 물리학

을 공부했고 8세때 
미국 항공우주국(N

ASA
) 초청으로 콜로라도 주립대 대학원

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12세부터는 5년간 NASA 선임연구원으

로 일했다. 당시 언론은 연일 ‘신동’‘대단

한 천재소년’으로 보도했다.
 

그러던 78년, 갑자기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한 천재는 81년 지방대인 충북대에 입학했다. 

언론과 주위에서는 ‘실패한 천재’로 표현했다. 

전공 역시 물리학에서 스스로 토목공학으로 바꿨다. 

그뒤 국토환경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다 현재는 충북개발공사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지낸다. 

최근 그는 세계 3대 인명사전, 즉 미국인명연구소(ABI)의 ‘21세기 위

대한 
지성(Great Minds of the 21st Century)’에, 미국 마퀴스 세

계 인명사전(Marquis Who’s Who in the World) 23판과 영국 
케임

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가 선정하는 ‘21세기 우수 과학자 2000’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그러자 언론은 ‘60년대 신동’이 ‘세계의 지성’으로 인정받았다고 보도했다. 

김웅용(44)씨. 귀국하기 전까지 천재라는 ‘박제’ 속에 살았다. 

주위 시선도 내내 부담스러웠고 인명사전 등재도 정작 본인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그저 ‘보통 사람’이고 싶었고 그렇게 사는 게 행복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3년째 야학교사로 남모르게 봉사활동하고 있다. 

직장인으로, 아이 둘을 키우는 평범한 가장으로 살면서 미처 배움의 기회를 놓친 50∼60대의 아주머니들을 위해 아름다움을 베풀고 있는 것. 

쇄도하는 언론 인터뷰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며 거부하는 그에게 ‘진실한 인생 얘기 한번 해보자’며 설득했다. 지난달 27일 낮 그가 다니는 직장 근처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한 ‘성암야학’입니다. 

중학과 고교과정의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나이든 아주머니들이 대부분이죠.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2교시를 가르치는데 과학과 수학을 맡았습니다. ”

야학교사가 된 동기가 궁금했다. 

충북대학에 다닐 적에 ‘청심회’라는 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대학 졸업후에는 이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맡게 됐는데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야학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뜻 지원했다. 

그러나 야학교사의 기준이 ‘대학 재학생’으로 정해져 있어 탈락했다. 

3년 뒤 어느날 규칙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어 다시 지원했다. 자신이 초·중·고교과정의 검정고시를 거쳤기에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알고 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됐다. 

그렇게 시작된 지 3년. 나이든 제자들도 많다. 

그는 “합격한 아주머니가 휴대전화 메시지로 ‘소주 한잔 사겠다. ’는 연락이 올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 ”면서 어른들도 영어나 수학 등 암기과목을 싫어하더라며 빙그레 웃는다. 

아울러 야학교사들 중에는 대학 제자들도 있으며 비록 열악한 환경일지라도 만학의 자세가 다들 진지하다고 강조했다. 

자신도 “어른 분들을 가르치다 보면 오히려 배우는 것도 많다. ”고 의미부여를 했다. 

화제를 바꿔 ‘천재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 무엇이냐고 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숫자로 성적 매기는 것, 그리고 공부를 얼마만큼 빨리 하느냐 등등 자꾸 비교하는 것, 또 천재가 왜 그 대학에 안 가고 지방대학에 갔느냐 하는 시선들이 정말 싫었다. ”고 털어놨다. 

충북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그 자체로 봐줘야지 자꾸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느낌이 못마땅했다고 토로했다. 

특히 일부 사람들이 “연세대 나온 부인이 충북대 졸업한 사람과 어떻게 결혼했느냐.”고 질문할 때는 정말 황당했단다. 

자신은 현재 가정적으로나 직장에서 행복과 보람을 만끽하며 지내는데 그런 식의 편견을 접할 때마다 많은 실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숫자나 성적순이 결코 행복이 아닐 텐데 왜 자꾸 이상한 잣대로 평가하려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영재교육과 관련,“우리나라의 영재학교는 자기실력을 계발하는 곳이 아니라 좋은 대학에 보내려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다 보니 영재학원이 난립하고 부모들은 아이들의 소질이 어디에 있는지 관찰하고 기다려주지도 못한 채 그저 박제된 틀에 밀어넣는 꼴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아이를 무조건 소문난 피아노학원에 보내면 한두달 뒤 아이는 ‘손가락 아파서 못하겠다’는 광경이 그렇다고 했다. 또 “1∼100까지 써오라는 숙제를 왜 그렇게 많이도 주는지….”라고 덧붙였다. 

김씨 자신도 뼈저리게 경험했듯이 또래 집단과 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지 무조건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영어단어 암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배워야 하는 까닭을 알려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끔 똑똑한 아이들이 자살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다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김씨도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초·중·고교 과정을 거치지 않고 미국에 건너갔다. 

주위의 부추김과 화려한 시선에 짓눌려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된다는 것도 그렇지만, 매일 쳇바퀴처럼 꽉 짜여진 일정 속에서 대학원 공부를 해야만 했다. 

이어 NASA 연구실에서 일하면서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할까’ 하는 회의감에 빠졌다. 

NASA에서는 ‘계산과 예측’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그의 재능을 필요로 했다. 결국 미국에서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귀국결심을 했다. 

이후 끌려다녔던 시절을 뒤로 하고 다시 처음부터 목표를 세워 진정한 자신의 길을 걸었다. 

초·중·고 검정고시를 연이어 치렀다. 이때에도 천재가 검정고시를 보느냐며 언론에서는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 때문에 20점 만점에 13점밖에 못받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 학교를 건너 뛰다 보니 검정고시 보면서 생소한 것을 많이 접했다. 

노천명의 시 중에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어느 동물인가요’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사슴과 기린 중 기린에 동그라미를 쳤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슴이더군요.”

이런 과정을 거친 후 김씨는 자신을 특별하게 봐주지 않는 지방대에서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리고 봉사활동하며 모처럼 인간다운 참맛을 체험했다. 

김씨는 요즘 생활이 즐겁다고 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직장에서의 무한한 기대감, 그리고 8명의 팀원들과 동고동락하는 생활이 무척 만족스럽다고 했다. 

천재라는 말도 잊은 지 오래고, 또 잊어달라고 주문했다. 

그는 “주위에서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가장 부러웠다. ”고 했다. 

충북대 재학시절 원주고 출신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나중에는 동창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해줘 너무 고마웠단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원주고 교가를 배웠고 원주고 25회 모임에 나갈 자격증(?)까지 땄다며 밝게 웃었다. 

부인이 연세대 연구교수(인지과학)로 재직 중이어서 주말부부로 청주에서 지낸다. 

충북대 봉사활동 중에 부인을 만났으며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다. 

초등 2년생인 첫째는 운동을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라고 귀띔한다. 

건국대와 이화여대 교수였던 부모는 정년퇴임하고 서울에서 살고 있다. 

“어떤 맞춰진 틀에 사는 것이 과연 인생일까요? 지금 이대로

가 진실이고 가장 행복합니다. ”


■ 김응용 그가 걸어온 길

▲1962년 서울 출생

▲66년 한양대 물리학과 특별입학

▲69년 건국대 4년 편입

▲70년 콜로라도대학원 물리학과 입학

▲74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선임연구원

▲78년 귀국, 이후 초·중·고교 검정고시 합격

▲81년 충북대 토목공학과 입학

▲85년 동대학 졸업

▲91년 육군병장 만기제대

▲98년 동대학원 토목공학 박사학위. 이후 충북대 시간강사, 
카이스트 대우교수, 국토환경연구소 연구위원 근무

▲2006년 7월∼현재 충북개발공사 근무


천재 딱지떼니 살맛나요

소박한 삶에서 행복 찾은 `천재 소년' 김웅용씨

(청주=연합뉴스) 박종국 기자 =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천재'라는 딱지가 붙고 난 뒤의 삶에 `나'는 없었습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틀에 따라 춤추다 보니 이게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960년대 6살의 나이로 미적분을 풀어내 `천재 소년' `신동'으로 불리면서 세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항공우주국(NASA)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으나 1980년대 돌연 귀국해 지방대에 입학하면서 `실패한 천재'라는 꼬리와 함께 영재교육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꼽혔던 김웅용(42.충북개발공사 보상팀장)씨.

최근 세계 3대 인명 사전에 잇따라 오르면서 또 다시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된 그가 15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그는 세계 인명 사전에 올랐다는 보도자료가 `천재'였던 자신의 과거를 또 다시 들춰내게 될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달 7일 충북개발공사가 배포했던 홍보 자료에는 `김웅용 보상팀장이 세계 3대 인명 사전에 올랐다'는 짤막한 내용만 담고 있었다.



그의 전력(?)을 알게 된 언론에서 캐물을 때도 그는 "현재의 저에 대해서만 있는 그대로 평가해달라"며 과거를 묻고 싶어 했다. 

김씨는 세인들에 의해 `신동'에서 `실패한 천재'까지 극과 극의 평가를 받으며 살았던 지난 날이 견디기 힘겨웠다고 회고했다. 

"초등학교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미국으로 건너갔던 터라 국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초.중.고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습니다. 당연히 거쳐야 할 과정인데도 `천재라더니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른다'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더군요. 하소연할 길도, 해명할 기회도 없었죠. 대학 입시를 위한 체력 검사를 치르는 절박한 수험생 처지였는데도 카메라를 들이 대고...언론에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받는다는 느낌 밖에 없었습니다"

스포트라이트가 화려했던 만큼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귀국한 그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는 어린 나이에 감내하기 어려울 만큼 혹독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렇게 뉴스의 초점에서 멀어지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었다. 

자신을 특별나게 봐주지 않는 지방대에서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려 놀고 공부하며 사람사는 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전공으로 삼은 토목공학으로 박사 과정까지 밟고 난 뒤 카이스트에서 대우교수로 대학원생들을 가르치고 국토환경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 1988년 이후 지금까지 10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학회지에 발표하는 등 자신의 일에 흠뻑 빠져들 수 있었다. 

2005년 국제수리학회(IAHR) 등에 낸 "GIS/RS를 이용한 새로운 유달률(流達率)의 공간적 패턴의 새로운 산정 기법' 논문의 경우 인공위성 등을 이용해 오염물질이 하류에 떠내려 오는 비율을 산정해 내는 새로운 방식에 관한 연구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발표하는 잇단 논문들이 국제 학회의 관심을 끌면서 Who's Who in the world를 비롯한 세계 3대 인명사전들은 일제히 올해판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최근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 고생을 또 다시 겪었다. 

3대 인명 사전에 오른 것이 사실인 지, 그런 인물이 왜 교수가 되지 못하고 하위직 준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지를 묻는 식으로 그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글들이 인터넷상을 떠돌았다.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있는 인명 사전과 등재될 것을 알리는 통보서 등을 펼쳐 보인 그는 "국내에서도 세계 인명 사전에 오른 경우가 적지 않은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세상이 여전히 자신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섭섭함이 묻어있었다. 

"대학교수요? 생각했었죠. 2군데 지원해본 뒤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재의 교수 선발 관행에서 지방대 출신이 설 땅은 없었습니다. 모교는 이미 교수 정원이 차 있고... 꼭 교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요"

그는 7월 입사해 8명의 팀원들과 함께 웃고 고민하며 고락을 같이 하는 현재의 생활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곳이라 가능성이 크다고 봤습니다. 책상머리에서 이론으로만 접했던 것들을 현장에 적용해보며 오류를 바로 잡는 것도 재미있고 또 학문적 토대나 영역을 넓혀 나가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 행복하면 그만 아닙니까"

인터넷상에 떠도는 것 처럼 그렇게 낮은 직급도 아니라는 그는 "왜 자신들의 잣대로 직업의 귀천을 평가하는 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3년전 시작해 지금도 야학 교사로 일한다는 그는 "연세드신 분들을 가르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것이 많다"고 말했다. 

"행복이란 남이 정해놓은 틀에 맞춰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에 흠뻑 빠져들 때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 그는 "하고 싶은 일에 묻혀 사는 지금의 제 모습 그대로만 보고 평가해 줬으면 좋겠다"며 "이제 `천재'라는 꼬리표는 제발 떼어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자료 참조:서울신문.연합뉴스


세계 지성으로 우뚝 선 천재소년
2006-09-07 14:082006-12-07 17:30
1966년 (당시 3세) 김웅용군 [동아일보 자료사진]

1960년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동이 있었다.

5살때 4개 국어를 구사하고 6살때 일본 후지TV에 출연해 미적분을 풀어내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이큐 210. 1980년판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지능지수 보유자로 오르기도했다.

4살때부터 7살때까지 청강생으로 한양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8살때인 1970년미국 우주항공국(NASA)의 초청으로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면서 1974년부터 5년간 나사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던 김웅용(42.공학박사)씨.

6살때 미적분을 풀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천재소년\'에서 세계 3대 인명 사전에 오르며 세계의 지성으로 우뚝 선 김웅용씨
그러나 1978년 돌연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해 1981년 충북대에 입학하자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실패한 천재'라고 이름을 달아 입방아에 올렸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패한 천재가 아니었다.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또래도, 친구도 없이 미 항공우주국이 주는 과제를 수행하는 쳇바퀴같은 '박제 인생'에 질려 돌아왔을 뿐 실패한 삶을 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천재 소년'에서 인간다운 삶을 사는 보통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어 지방대를 택한 것이 '실패한 천재'처럼 비쳐졌을 뿐이다.

한양대 사대 강사였던 어머니 유명현씨와 김웅용군(오른쪽)등 3남매[동아일보 자료사진]
충북대에 입학하면서 토목공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국토환경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일하면서 연세대와 충북대에서 강의를 하는 바쁜 일상속에서도 그는 꾸준히 국내외 저널에 치수와 수리학 분야 논문 90여편을 게재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알리기 시작했다.

결국 올들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3대 인명사전에 모두 오르면서 그는 명실상부한 세계의 지성으로 인정받게 됐다.

올들어 미국 마르퀴즈 세계 인명사전(Marquis Who′s Who in the World) 23판과영국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가 선정하는 '21세기 우수 과학자 2000(2000 Outstanding Intellectuals of the 21th Century)'에 잇따라 올랐던 김 팀장은 최근 미국 ABI(미국인명연구소)의 '21세기 위대한 지성'(Great Minds of the 21st Century)에 선정됐다.

10여년만에 체력장검사장에 모습을 나타낸 천재소년 김웅용군.[동아일보 자료사진]
또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의 토목 및 환경공학분야의 ‘올해의 국제교육자’(International Educator of the Year, 2006)로 선정됐으며 이 센터 종신부이사장으로 선임돼 아시아를 대표하게 됐다.

이 단체로부터는 올 11월 국제 공로훈장(International Order of Merit)도 수상할 예정이다.

올초 설립된 충북개발공사에 입사해 보상팀장을 맡아 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는 자신을 별난 존재로 봐주지 않는 인간적인 동료들과 함께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는데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인터뷰 요청에 그는 "천재 소년이라는 딱지때문에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며 "평범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처럼 순수하게 학문적, 업무적으로만 평가받고 싶다"고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면서 "언론의 괜한 호기심으로 저나 다른 동료들이 업무에 지장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언론에 보도되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청주=연합뉴스) 

과거 한국에는 수많은 영재들이 있었다. 

그중 단연 돋보였던 인물은 IQ 210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던

"세계 최고 천재" 김웅용 씨였다 

김웅용 씨는 1962년 서울에서 건국대 물리학과 교수인 김수선씨와 

이화여대 의대교수인 류명현씨 사이에서 4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5살때 4개 국어를 구사하고, 6살 때는 일본 후지 TV에 출연해 

미적분을 풀어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IQ 210으로 1980년판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지능지수 보유자로 올랐다.



그는 청강생으로 한양대에서 물리학 공부를 하다가 8살 때 

미 우주항공국(NASA)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콜로라도 주립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대학원에 다니면서 74년부터 

5년동안 NASA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사춘기를 맞이할 십대 초반 나이에 세계적 연구 기관의 연구원으로 활약하던 

김웅용은 16세인 1978년 8년여의 미국생활을 접고 NASA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은 채 귀국을 한다. 

당시 김웅용 씨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지적 능력을 착취당하다시피 했다. 

그가 NASA에서 한 일은 

오늘날 컴퓨터가 대신하는 기계적인 계측 뿐이었다. 

사실상 NASA는 한국의 천재를 데려다가 자신들 목적에 따라 이용한 셈. 

김웅용씨는 당시 NASA에서의 연구 생활을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고 회상한다. 

김웅용 씨에 대한 지적 능력 착취는 비단 NASA에서 뿐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언론과 방송은 연일 김웅용 씨의 천재성을 '볼거리'로 삼았고, 

그는 대중들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볼거리' 용으로 착취당해야 했다. 

한국에 돌아온 김웅용 씨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모든 학교 정규 과정을 건너뛰었던 그에겐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었다. 

결국 검정고시 등으로 정규 과정을 

대신한 그는 대학을 일부러 아무 연고가 없는 지방대(충북대)를 택해 들어갔다. 

그리고 약 25년이 흐른 지금, 그는 국내 권위있는 토목공학계 

연구원의 삶을 살고 있다. 비록 대학 교수직을

얻는 것은 포기했지만, 현재 국토환경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그리고 연세대와 충북대 등에서 강의를 하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간의 90여편의 논문을 바탕으로 국제인명사전 

‘후즈 후(Marquis Who’s Who in the World)’ 2006년 판에도 등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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